“지갑은 얇아지는데, 물가는 왜 계속 오를까?” 요즘 많은 분들이 체감하는 경제 현실일 겁니다. 수출 실적은 좋다는데 정작 내수 경기는 좀처럼 살아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고금리의 이자 부담은 여전합니다. 이처럼 꽁꽁 얼어붙은 소비 심리를 녹이기 위해, 최근 정치권을 중심으로 ‘전 국민 25만 원 지원금’과 같은 정부의 재정 지출 확대 카드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과연 정부가 막대한 나랏빚을 내어 돈을 풀면, 꺼져가는 내수 경제의 불씨를 되살릴 수 있을까요? 아니면 가뜩이나 높은 물가에 기름을 붓는 위험한 도박이 될까요? 이 뜨거운 논쟁의 한가운데에는 경제학의 오래된 개념, 바로 ‘재정 승수효과(Fiscal Multiplier Effect)’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 재정 승수효과가 과연 지금 우리 경제에도 유효한 ‘마법의 지팡이’인지, 아니면 이미 효력을 잃은 ‘낡은 이론’에 불과한지, 그 실체를 알기 쉽게 파헤쳐 보겠습니다.
1. “마중물”인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인가? 재정 승수효과, 개념부터 확실히!
재정 승수효과라는 말이 조금 어렵게 들릴 수 있지만, 그 원리는 생각보다 간단합니다. 정부가 1만큼 돈을 썼을 때, 나라 전체의 소득(GDP)이 그보다 얼마나 더 많이 늘어나는지 보여주는 배수(倍數)라고 생각하면 쉽습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 정부가 1,000억 원을 투입해 새로운 도로를 건설하는 사업을 시작합니다.
- 건설사는 그 돈으로 건설 노동자에게 임금을 주고, 시멘트나 철근 같은 자재를 구매합니다.
- 월급을 받은 노동자들과 자재를 판매해 돈을 번 업체는 그 소득으로 동네 식당에서 밥을 사 먹고, 자녀의 옷을 사는 등 소비를 합니다.
- 이 소비는 다시 식당 주인과 옷 가게 주인의 소득으로 이어지고, 이들 역시 또 다른 소비를 하게 됩니다.
이처럼 ‘정부지출 → 기업/가계 소득 증가 → 소비 증가 → 다른 사람의 소득 증가’라는 연쇄 반응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면서, 처음 정부가 썼던 1,000억 원보다 훨씬 더 큰 경기 부양 효과를 만들어낸다는 이론입니다.
만약 재정승수가 ‘1.5’라면, 정부가 1,000억 원을 지출했을 때 최종적으로 GDP는 1,500억 원이 늘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대로 승수가 ‘0.5’처럼 1보다 작다면, 1,000억 원을 쏟아부어도 GDP는 500억 원만 증가하는 데 그쳐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될 수도 있다는 뜻이죠. 그렇다면 오늘날 재정 승수효과를 둘러싼 평가는 어떨까요?
2. “승수효과는 옛말이다” – 효과가 사라지는 3가지 이유
과거 경제학의 기본 원리였던 승수효과가 오늘날 예전 같지 않다는 회의적인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 경제의 체질이 과거와 크게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① 눈덩이처럼 불어난 나랏빚과 가계빚
가장 큰 걸림돌은 바로 ‘빚’입니다. 이미 1,100조 원을 넘어선 국가채무는 사람들의 심리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경제학에서는 이를 ‘리카도의 대등정리’라는 개념으로 설명하는데요, 쉽게 말해 정부가 빚을 내서 돈을 나눠주면, 사람들은 “결국 미래에 세금을 더 걷어서 갚겠지”라고 예상한다는 겁니다. 이 때문에 늘어난 소득을 소비하기보다는 미래의 세금 부담에 대비해 저축하려는 경향이 커져 승수효과가 상쇄됩니다.
여기에 세계 최고 수준인 가계부채 문제도 심각합니다. 빚이 많은 가계는 정부로부터 지원금을 받아도 소비를 늘리기보다 당장 급한 대출 원리금을 갚는 데 우선적으로 사용합니다. 이 경우 돈이 시장에서 돌고 도는 것이 아니라 곧바로 금융기관으로 흡수되어 연쇄적인 소득 증대 효과를 일으키지 못하게 됩니다.
② “메이드 인 코리아” 대신 해외 직구? 높아진 수입 의존도
정부 지원금으로 소비를 해도 그 돈이 국내 생산과 소득으로 이어져야 승수효과가 발생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요? 우리는 해외 직구로 외국 상품을 쉽게 구매하고, 국산차 대신 외제차를 선택하는 비중도 높아졌습니다. 이처럼 소비가 수입품 구매로 이어지면, 그 돈은 국내 경제를 순환하지 않고 해외로 빠져나가게 됩니다. 경제의 글로벌화가 심화될수록 이러한 ‘누수 효과’는 갈수록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③ 정부가 돈 쓰려다 민간 투자 막는 ‘구축효과’
정부가 대규모 지출을 위해 국채를 대량으로 발행하면, 시중의 자금이 국채 시장으로 쏠리게 됩니다. 이는 시중 금리를 상승시키는 요인이 될 수 있고, 높아진 금리는 기업의 투자와 가계의 소비를 위축시키는 부작용을 낳을 수 있습니다. 즉, 정부의 지출이 오히려 민간의 경제 활동을 몰아내는 ‘구축효과(Crowding-out Effect)’를 일으켜 경기 부양 효과를 반감시키는 것입니다.
3. “아니다, 위기일수록 빛을 발한다!” – 승수효과가 살아나는 조건
반면, 특정 상황에서는 재정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며 승수효과가 여전히 강력하게 작동한다는 주장도 팽팽하게 맞섭니다.
① 극심한 경기 침체기, 정부만이 구원투수
실업률이 치솟고 공장 가동률이 바닥을 치는 극심한 불황기에는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민간 부문이 두려움에 소비와 투자를 완전히 멈춘 상황에서는 정부 지출이 민간과 경쟁할 여지가 없어 ‘구축효과’가 거의 발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부가 만들어낸 최소한의 수요가 얼어붙은 민간의 투자와 소비 심리를 회복시키는 ‘마중물’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국제통화기금(IMF)도 글로벌 금융위기나 코로나19 팬데믹과 같은 심각한 위기 상황에서는 재정승수가 1을 훌쩍 넘어서며 매우 효과적이었다고 분석한 바 있습니다.
② ‘어디에’ 쓰느냐가 핵심! 현금 살포 vs. 미래 투자
재정 지출의 ‘내용’에 따라 승수효과는 하늘과 땅 차이로 달라질 수 있습니다.
- 정부 직접 투자 (SOC, R&D 등): 도로, 항만, 철도 같은 사회기반시설(SOC)에 투자하면 즉각적인 고용 창출과 자재 수요를 유발합니다. 또한, 장기적으로는 국가 전체의 생산성을 높여 승수효과가 비교적 크게 나타납니다. 미래 성장 동력을 위한 연구개발(R&D) 투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 이전지출 (현금성 지원): 반면, 모든 국민에게 동일한 금액을 나눠주는 재난지원금과 같은 현금성 지원(이전지출)은 앞서 언급했듯 일부는 저축되거나 빚을 갚는 데 쓰여 실제 소비로 이어지는 비율이 상대적으로 낮습니다. 따라서 승수효과도 정부의 직접 투자보다 낮게 평가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4. 그래서, 지금 한국은? KDI와 한국은행의 냉정한 진단
그렇다면 국내 주요 연구기관들은 현재 한국의 상황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요?
기관 | 주요 분석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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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개발연구원(KDI) | – 현재 한국의 재정지출 승수는 약 0.3~0.4 수준으로 추정. – (의미: 정부가 1조 원을 써도 GDP는 3,000억~4,000억 원 증가에 그침) – 현금성 지원 승수는 0.2~0.3, 정부 투자 승수는 0.5 안팎으로 차이가 큼. – 단기 부양보다 미래 성장 잠재력을 높이는 R&D, 인적자본 투자 등이 더 효과적이라고 제언. |
한국은행(BOK) | – 재정지출의 효과가 점차 약화되고 있음을 지적. – 팬데믹 시기 재난지원금 지급 결과, 소득 상위 계층은 대부분 저축하고 하위 계층만 소비하는 등 계층 간 소비 성향 차이가 뚜렷하게 나타남. – 이는 보편적 현금 지원의 효율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근거가 됨. |
결론적으로, 국내 연구기관들은 현재 한국의 재정승수가 과거보다 낮아졌다고 평가하면서도, ‘어떤 방식’으로 지출하느냐에 따라 효과가 크게 달라진다는 점을 명확히 하고 있습니다.
결론: ‘만병통치약’은 없다, ‘현명한 처방’이 필요할 때
‘정부 재정 지출의 승수효과는 유효한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예” 또는 “아니오”가 아닙니다. 정답은 “어떤 상황에서, 어떤 방식으로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효과는 극적으로 달라진다”입니다.
이제 우리는 승수효과 자체의 유무를 따지는 소모적인 논쟁에서 벗어나, ‘어떻게 하면 한정된 재원으로 승수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초점을 옮겨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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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에’ 쓰는가가 핵심입니다: 모든 국민에게 똑같이 돈을 나눠주는 보편적 현금 지원은 높은 부채 수준과 수입 의존도 때문에 효과가 제한적일 가능성이 큽니다. 반면, 정말 어려운 취약계층을 선별해 두텁게 지원하거나, 장기적인 성장 잠재력을 높이는 구조적 투자(SOC, R&D)는 더 효과적인 ‘마중물’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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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 목표를 명확히 해야 합니다: 지금 재정 지출의 목표가 당장의 소비 진작을 통한 ‘단기 부양’인지, 아니면 경제 체질 개선을 위한 ‘장기 성장’인지 분명히 해야 합니다. 목표에 따라 효과적인 지출 방식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현대 경제에서 재정 승수효과는 더 이상 과거와 같은 만병통치약이 아닙니다. 하지만 경제 위기 상황에서 정부의 적극적인 재정 역할은 여전히 중요합니다. 관건은 주어진 재원을 얼마나 정교하고 효율적으로 설계하여 ‘새는 돈’을 막고, 우리 경제의 선순환으로 이끌어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