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PI는 안정인데 장바구니 물가는 왜 비쌀까

공식 물가는 2%대라는데, 왜 내 월급은 통장을 스쳐갈 뿐일까?

“정부 발표를 보면 물가 상승률이 2%대로 안정세라는데, 도대체 어느 나라 이야기인가요? 시장만 가면 모든 게 두 배로 뛴 것 같아요.”

최근 친구들과의 대화나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가장 흔하게 들을 수 있는 푸념입니다. 통계청이 발표하는 공식 소비자물가지수(CPI)는 분명 안정권에 접어들었다고 하는데,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현실 속 물가는 그야말로 고공행진 중입니다. 월급은 제자리걸음인 것 같은데 장바구니 비용, 점심값, 커피값은 왜 이렇게 무섭게 오르는 걸까요?

과연 정부의 통계가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우리의 ‘느낌’ 속에 숨겨진 또 다른 경제적, 심리적 비밀이 있는 걸까요? 많은 분이 느끼는 이 답답한 괴리감의 원인을 구체적인 데이터와 사례를 통해 속 시원하게 파헤쳐 보겠습니다. 내 느낌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실 겁니다.

1. ‘평균의 함정’: 내 장바구니는 평균이 아니다

가장 먼저, 공식 물가 지표인 소비자물가지수(CPI, Consumer Price Index)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이해해야 합니다. 정부는 전국 도시 가구가 주로 소비하는 약 458개의 대표 상품과 서비스로 구성된 가상의 ‘장바구니’를 만듭니다. 그리고 이 품목들의 가격 변동을 조사한 뒤, 각 품목이 전체 가계 소비에서 차지하는 중요도인 ‘가중치’를 곱해 평균을 냅니다.

문제는 바로 이 ‘평균’‘가중치’라는 개념 속에 숨어있습니다.

실제 데이터는 이 ‘평균의 함정’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데이터로 보는 지표 물가 vs 체감 물가 (2024년 4월 기준, 통계청)]

구분 전년 동월 대비 상승률 현실 체감도
소비자물가지수 (전체 평균) +2.9% 정부가 ‘물가 안정’의 근거로 제시하는 숫자
생활물가지수 (자주 사는 품목) +3.5% 전체 평균보다 높으며, 실제 장바구니 부담을 더 잘 반영
신선식품지수 (과일·채소 등) +19.1% 국민이 가장 큰 고통을 느끼는 부분! (신선과실 +38.7% 폭등)

표에서 볼 수 있듯, 우리가 매일 또는 매주 사는 농축수산물이나 가공식품의 가격은 무려 20% 가까이 폭등했습니다. 특히 사과, 배 같은 과일값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죠. 하지만 이런 품목들은 458개 전체 품목 중 일부일 뿐이라 가중치가 상대적으로 낮습니다.

반면, 가중치가 높은 전·월세, 통신비나 몇 년에 한 번 바꾸는 TV, 자동차 같은 내구재 가격이 안정세를 보이면, 사과나 배추 가격이 두 배로 폭등해도 전체 물가 상승률은 크게 오르지 않는 ‘통계적 착시 현상’이 발생합니다. 통계상의 숫자는 안정적일지 몰라도, 우리의 일상적인 고통은 전혀 반영되지 않는 것입니다.

2. 가격표는 그대로인데… 교묘한 ‘보이지 않는 가격 인상’

“가격은 그대로라는데, 왜 양이 줄어든 것 같지?” 이런 경험, 다들 한 번쯤 있으실 겁니다. 이는 기업들이 소비자의 가격 저항을 피하기 위해 사용하는 교묘한 전략으로, 이 역시 체감 물가를 끌어올리는 주범입니다.

  • 슈링크플레이션 (Shrinkflation): ‘줄어들다(Shrink)’와 ‘인플레이션(Inflation)’의 합성어입니다. 가격을 그대로 유지하는 대신 제품의 용량을 줄이는 방식입니다. 과자 봉지를 뜯었는데 절반이 질소라 허탈했던 경험, 아이스크림 크기가 눈에 띄게 작아진 것 등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 사례: CJ제일제당 ‘숯불향 바베큐바’는 한 팩에 4개에서 3개로, 서울우유 ‘체다치즈’는 12장에서 10장으로 매수가 줄었습니다. 가격표는 그대로지만 g당, 개당 가격은 실질적으로 인상된 셈입니다.
  • 스킴플레이션 (Skimpflation): ‘인색하게 굴다(Skimp)’와 ‘인플레이션(Inflation)’을 합친 말입니다. 가격과 용량은 그대로 두면서 원재료를 더 저렴한 것으로 바꾸거나 서비스의 질을 낮추는 방식입니다.

    • 사례: 냉동 피자의 치즈 토핑이 줄어들거나, 식당에서 무료로 제공되던 반찬 가짓수가 줄고 추가 요금을 받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호텔에서 매일 제공하던 무료 룸 클리닝 서비스를 유료로 전환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그림자 인상’은 소비자가 느끼는 만족도를 크게 떨어뜨리지만, 가격표에는 변화가 없어 공식 물가 지수에는 즉각 반영되기 어렵습니다.

3. 월급은 올랐는데 왜 더 가난해졌을까? ‘실질소득’의 추락

“그래도 작년보다 월급이 오르긴 올랐는데…”라고 위안을 삼아보지만, 살림살이는 더 팍팍해진 것만 같습니다. 이 의문의 해답은 바로 ‘실질소득’에 있습니다.

  • 명목소득: 세금 떼고 통장에 실제로 찍히는 액수.
  • 실질소득: 그 돈으로 실제로 얼마나 살 수 있는지를 나타내는 진짜 구매력.

쉽게 말해 “월급 인상률 – 물가 상승률 = 진짜 내 소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월급이 3% 올랐는데 물가가 3.5% 올랐다면, 통장에 찍힌 숫자는 늘었어도 실제 구매력은 오히려 0.5% 감소한, 즉 더 가난해진 셈입니다.

통계청의 ‘2023년 가계동향조사’는 이 문제를 정면으로 보여줍니다.
2023년 가구당 월평균 명목소득은 전년 대비 3.9% 증가했지만, 같은 기간 소비자물가3.6% 상승하면서 물가 상승분을 뺀 가계 실질소득은 오히려 1.8% 감소했습니다.

-1.8%라는 수치는 관련 통계 작성 이래 역대 최대 감소 폭입니다. 대한민국 국민 대다수가 역사상 가장 가파른 실질 구매력 하락을 경험했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경제가 성장했다는 뉴스 속에서도 “살기 힘들다”는 목소리가 터져 나오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4. 우리는 숫자가 아닌 ‘경험’으로 기억합니다

경제는 결국 사람의 심리입니다. 통계가 아무리 객관적인 숫자를 제시해도, 우리가 물가를 인식하는 방식은 매우 주관적이고 심리적인 영향을 크게 받습니다.

  • 구매 빈도의 효과: 사람은 어쩌다 한 번 사는 품목의 가격보다 자주 사는 품목의 가격 변화에 훨씬 민감합니다. 매일 아침 사 마시는 커피값이 500원 오르는 것은 5년에 한 번 바꾸는 냉장고 가격이 20만 원 내린 것보다 훨씬 더 아프고 크게 다가옵니다.

  • 손실 회피 심리: 행동경제학에 따르면, 사람은 같은 금액이라도 이익에서 얻는 기쁨보다 손실에서 느끼는 고통을 약 2배 이상 크게 느낀다고 합니다. 마트에서 계란 한 판 가격이 500원 내렸을 때의 기쁨보다, 500원 올랐을 때의 충격과 분노가 훨씬 더 오래, 그리고 강렬하게 기억되는 이유입니다.

  • 나만의 개인 물가 지수: 가장 중요한 점은 모든 사람의 소비 패턴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자가용으로 출퇴근하는 직장인은 유류비에, 어린 자녀를 둔 부모는 분유와 과일값에, 외식을 자주 하는 1인 가구는 외식비 인상에 가장 큰 타격을 받습니다. 정부가 발표하는 CPI는 대한민국 ‘평균’ 가구의 이야기일 뿐, 결코 당신의 이야기가 아닐 수 있습니다.

결론: 당신의 느낌이 틀리지 않았습니다

‘공식 물가는 안정적인데 왜 나만 힘들지?’라는 생각은 여러분의 착각이나 과장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복합적이고 합리적인 이유들이 존재합니다.

  1. 통계의 한계: CPI는 전체의 ‘평균’일 뿐, 우리가 자주 구매하는 식료품 가격 급등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평균의 함정’이 있습니다.
  2. 기업의 전략: 가격표 뒤에 숨은 ‘슈링크플레이션’‘스킴플레이션’이 우리의 실질적인 지출을 늘리고 있습니다.
  3. 실질소득 감소: 월급 인상률이 물가 상승률을 따라가지 못하면서, 우리의 실제 구매력은 역대 최대로 감소했습니다.
  4. 인지적 편향: 우리는 자주 사는 품목의 가격 인상을 더 크게 느끼고, 손실을 더 아프게 기억하는 심리적 요인이 강하게 작용합니다.

따라서 정부 발표와 내가 느끼는 현실 사이에 괴리가 있다고 해서 좌절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이러한 괴리가 왜 발생하는지 그 구조를 이해하는 것이, 앞으로 더 현명하게 소비하고 가계 경제를 꾸려나가는 첫걸음이 될 수 있습니다. 내 지갑 사정을 정확히 파악하고, 불필요한 지출을 줄이며, ‘가성비’를 넘어 ‘가심비’까지 고려하는 지혜로운 소비자가 되어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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