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20년’. 한때 우리는 이 말을 일본 경제를 설명하는 관용구처럼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 그림자가 우리에게 짙게 드리우고 있습니다. 한국은행과 한국개발연구원(KDI) 등 주요 기관들이 대한민국의 ‘성장 잠재력’을 나타내는 잠재성장률이 심리적 마지노선이던 2% 아래로 떨어졌다고 공식화했습니다. 이는 단순히 경기가 잠시 나빠졌다는 신호가 아닙니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경제의 기초 체력, 즉 ‘성장 엔진’ 자체가 급격히 식어가고 있다는 가장 강력한 경고음입니다.
자동차가 앞으로 나아가려면 엔진에 연료를 넣고, 부품들이 효율적으로 움직여야 합니다. 국가 경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제를 움직이는 엔진은 크게 ①일하는 사람(노동), ②기계와 공장(자본), ③기술과 혁신(총요소생산성), 이 세 가지로 이뤄집니다. 하지만 지금 대한민국은 이 세 가지 엔진이 동시에, 그것도 아주 빠르게 멈춰 서고 있는 초유의 복합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오늘 이 글에서는 잠재성장률 2% 붕괴가 우리 삶에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대한민국 경제의 심장을 멈추게 하는 세 가지 핵심 원인을 냉정한 데이터와 함께 깊이 파헤쳐 보겠습니다.
1. 사람이 사라진다: 일할 사람 없는 나라의 비극 (노동력 붕괴)
경제 성장의 가장 근본적인 동력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지금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속도로 ‘일할 사람’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추측이 아닌, 통계가 증명하는 냉혹한 현실입니다.
통계청의 「장래인구추계」는 충격적인 미래를 예고합니다.
* 생산연령인구(15~64세): 2022년 3,674만 명 → 2072년 1,658만 명 (반 토막 이하)
* 고령인구(65세 이상): 2022년 898만 명 → 2072년 1,727만 명 (생산연령인구 추월)
연도 | 생산연령인구 (15~64세) | 고령인구 (65세 이상) | 노년부양비 |
---|---|---|---|
2022년 | 3,674만 명 | 898만 명 | 24.4명 |
2072년 | 1,658만 명 | 1,727만 명 | 104.2명 |
노년부양비: 생산연령인구 100명이 부양해야 하는 고령인구 수
표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숫자는 ‘노년부양비’입니다. 2022년에는 일하는 사람 약 4명이 노인 1명을 부양했다면, 50년 뒤에는 일하는 사람 1명이 노인 1명을 부양해야 하는 시대가 온다는 뜻입니다. 이는 연금 고갈, 건강보험 재정 파탄, 그리고 사회 전체의 활력 저하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역시 한국의 잠재성장률 하락 속도가 회원국 중 가장 빠를 것이라고 경고하며, 그 핵심 원인으로 바로 이 ‘급격한 인구 고령화’를 지목했습니다. 경제라는 자동차의 연료탱크가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소비할 사람도, 혁신할 청년도, 공장을 돌릴 노동자도 사라지는 미래. 이것이 우리가 마주한 첫 번째 위기입니다.
2. 혁신이 멈춘다: 돈만 쏟아붓는 ‘밑 빠진 독’ (총요소생산성 둔화)
인구가 줄어도 기술 혁신과 생산성 향상을 통해 성장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 노동(L)과 자본(K) 투입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성장의 ‘알파(α)’, 이것이 바로 총요소생산성(TFP, Total Factor Productivity)입니다. 기술 발전, 경영 혁신, 효율적인 제도 등 눈에 보이지 않는 성장의 핵심 동력이죠.
문제는 대한민국의 총요소생산성 증가율이 급격히 둔화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총요소생산성 증가율은 2000년대 연평균 1.5%에서 2010년대 들어 0.5%로 추락했습니다. 이는 같은 기간 미국, 독일, 일본 등 주요 선진국과 비교해도 가장 큰 하락 폭입니다. 왜 이런 ‘혁신 동력 상실’이 일어난 것일까요?
첫째, ‘코리아 R&D 패러독스’입니다.
한국은 GDP 대비 연구개발(R&D) 투자 비중이 4.96%(2021년 기준)로 이스라엘에 이어 세계 2위입니다. 천문학적인 돈을 R&D에 쏟아붓고 있지만, 정작 사업화 성공률이나 특허의 질적 수준은 기대에 미치지 못합니다. 정부 주도의 R&D가 시장 수요와 동떨어져 있거나, 대학의 기초 연구가 기업의 상용화로 이어지지 못하는 ‘죽음의 계곡(Death Valley)’이 너무 깊기 때문입니다. 막대한 돈이 실제 생산성 향상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새어나가는 ‘밑 빠진 독’과 같은 상황입니다.
둘째, 혁신을 가로막는 ‘모래주머니 규제’입니다.
세계경제포럼(WEF) 평가에서 한국의 ‘규제 부담’ 순위는 141개국 중 87위에 불과합니다. 특히 신산업 분야에서는 법에 허용된 것만 할 수 있는 ‘포지티브 규제’가 여전히 강력하게 작동합니다. 인공지능, 바이오, 원격의료 등 미래 먹거리 산업에서 새로운 시도를 하려 해도 온갖 규제의 벽에 부딪혀 좌절하는 기업이 부지기수입니다. 유망 스타트업들이 규제를 피해 본사를 해외로 옮기는 ‘규제 엑소더스’는 더 이상 낯선 이야기가 아닙니다.
셋째, ‘제조업 외딴섬’ 현상입니다.
한국 경제의 또 다른 구조적 문제는 제조업과 서비스업 간의 극심한 생산성 격차입니다. 제조업의 생산성을 100으로 봤을 때, 서비스업의 생산성은 55.4에 불과합니다. 이는 미국(제조업 대비 83%), 독일(91%) 등과 비교하면 매우 심각한 수준입니다. 고용의 70%를 차지하는 거대한 서비스업 부문이 저부가가치 업종에 머물러 있으니, 경제 전체의 효율성이 올라갈 리 만무합니다.
3. 투자가 멈춘다: 곳간에 현금만 쌓아두는 나라 (자본 투자 부진)
사람이 줄고 혁신이 멈춰도, 기업이 미래를 보고 과감하게 투자한다면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공장을 짓고, 최신 기계를 도입하고, 새로운 사업에 뛰어드는 ‘자본 축적’은 성장의 마지막 보루입니다. 하지만 이 마지막 엔진마저 차갑게 식어가고 있습니다.
통계청에 따르면, 국내 기업들의 설비투자 증가율은 2022년 0.1%, 2023년 0.5%로 사실상 2년 연속 제자리걸음을 했습니다.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기업들에게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국내 기업(금융사 제외)이 보유한 현금성 자산은 800조 원에 육박하며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습니다. 기업들은 역대급 현금을 금고에 쌓아두고도 투자를 망설이고 있습니다. 이유는 명확합니다. 바로 ‘불확실성’ 때문입니다.
- 3고(高) 현상: 고금리, 고환율, 고물가로 인해 투자 비용과 금융 조달 부담이 급증했습니다.
- 대외 리스크: 미·중 패권 경쟁,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 지정학적 리스크가 상수가 되면서 미래 예측이 불가능해졌습니다.
- 국내 리스크: 경직된 노동시장과 앞서 언급한 과도한 규제 역시 기업들이 한국 내 투자를 꺼리게 만드는 핵심 요인입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국내 투자는 멈춘 반면, 해외직접투자(ODI)는 급증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2022년 한국의 해외직접투자는 역대 최대를 기록했으며, 특히 제조업의 해외 투자는 5년 만에 2배 이상 늘었습니다. 기업들이 높은 법인세, 강성 노조, 불필요한 규제를 피해 미국, 베트남 등 기회의 땅으로 떠나는 ‘산업 공동화’가 가속화되고 있는 것입니다. 국내에 쌓여야 할 자본과 양질의 일자리가 해외로 유출되면서 잠재성장률을 갉아먹는 악순환이 고착화되고 있습니다.
결론: 축소되는 미래, 지금 행동하지 않으면 현실이 된다
일할 사람이 사라지고(노동), 혁신의 아이디어가 막히고(총요소생산성), 미래를 위한 투자가 멈춘(자본) 나라. 이것이 바로 잠재성장률 2% 붕괴가 의미하는 대한민국의 현주소입니다. 이는 단순히 경제 성장률 숫자가 조금 낮아지는 문제가 아닙니다.
성장 파이가 더 이상 커지지 않는 ‘제로섬 사회’에서는 한정된 자원을 둘러싼 세대 갈등, 계층 갈등, 이념 갈등이 극에 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청년들은 더 이상 희망을 꿈꿀 수 없고, 노년층의 복지는 위협받으며, 국가는 재정 위기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말 그대로 ‘축소되는 대한민국’으로 가는 길입니다.
진단은 끝났습니다. 이제 처방과 행동이 필요합니다. 인구 구조를 단숨에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우리가 가진 다른 엔진의 성능을 극대화해야 합니다. 여성 및 고령층의 경제활동 참여를 늘리고, 외국인 인력을 유연하게 활용하는 노동시장 개혁, 신산업의 발목을 잡는 규제를 과감히 철폐하는 규제 혁명, 그리고 기업이 해외가 아닌 ‘한국’에 투자하고 싶게 만드는 기업 친화적 환경 조성이 그 시작입니다.
고도성장의 황금기는 끝났습니다. 이제는 저성장 시대를 버텨낼 새로운 생존 전략을 짜야 할 때입니다. ‘성장’이 아닌 ‘생존’을 위한 대전환, 지금 시작하지 않으면 ‘잃어버린 30년’은 우리의 현실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