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물가 지표, GDP 디플레이터가 말하는 진실

“월급 빼고 다 올랐다?” 숨은 물가 지표 ‘GDP 디플레이터’가 말해주는 경제의 진짜 모습

“월급 빼고 다 올랐다”는 말이 더 이상 농담처럼 들리지 않는 요즘입니다. 분명 뉴스에서는 우리나라 경제가 성장했다고 하는데, 왜 내 지갑 사정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걸까요? 2023년 한국의 명목 국내총생산(GDP)이 3.4% 성장했다는 발표에도 불구하고, 장바구니 물가는 치솟고 대출 이자 부담은 허리를 휘게 합니다.

이처럼 공식 경제 지표와 우리가 피부로 느끼는 체감 경기 사이에 깊은 골이 패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해답의 실마리는 바로 ‘숨은 물가 지표’로 불리는 GDP 디플레이터와 국가 전체의 소득이 누구에게 돌아갔는지를 보여주는 ‘분배’의 문제 속에 숨어 있습니다. 오늘 이 글을 통해 숫자 뒤에 가려진 우리 경제의 민낯을 속 시원히 파헤쳐 보겠습니다.

1. 숫자의 착시를 벗겨내다: 명목 GDP vs 실질 GDP

경제 성적표를 제대로 읽기 위해선 먼저 ‘명목’과 ‘실질’이라는 두 가지 개념을 알아야 합니다. 어렵게 생각하실 필요 없습니다. 아주 간단합니다.

  • 명목 GDP (Nominal GDP): 한 해 동안 생산된 모든 상품과 서비스에 ‘현재 가격’을 곱한 값입니다. 여기에는 실제 생산량이 늘어난 효과와 물가가 오른 효과가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즉, 생산은 그대로인데 물가만 올라도 명목 GDP는 커질 수 있습니다.
  • 실질 GDP (Real GDP): 물가 변동 효과를 제거하고 오직 ‘생산량’의 변화만을 측정하기 위해 기준 연도의 가격으로 계산한 값입니다. 경제의 실질적인 체력, 즉 얼마나 더 많이 만들어냈는지를 보여주는 진짜 성장률 지표입니다.

자, 이제 2023년 우리 경제 성적표를 다시 볼까요? 명목 GDP는 3.4% 성장했지만, 물가 상승분을 뺀 실질 GDP는 1.4% 성장에 그쳤습니다. 이 둘의 차이인 2.0%포인트. 이것이 바로 GDP 디플레이터이며, 2023년 우리 경제 전반의 종합적인 물가 상승률을 의미합니다.

이는 3.4%라는 겉보기 성장 중 상당 부분이 실제 생산이 늘어난 것이 아니라, 물가가 올라 만들어진 ‘착시 효과’였다는 불편한 진실을 드러냅니다. 우리는 1.4%만큼 성장했지만, 2.0%만큼의 물가 상승을 겪으며 3.4%라는 숫자를 받아 든 셈입니다.

2. 지표는 2%인데, 내 체감 물가는 3.6%? 이상한 괴리의 비밀

여기서 더 큰 문제가 발생합니다. “경제 전체 물가가 2% 올랐다고? 말도 안 돼! 마트만 가도 10~20%는 오른 것 같은데?” 라는 생각이 드실 겁니다.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입니다. 실제로 2023년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체감하는 물가와 더 가까운 소비자물가지수(CPI) 상승률은 3.6%로, GDP 디플레이터(2.0%)를 훨씬 웃돌았기 때문입니다.

이 엄청난 격차는 왜 발생하는 걸까요? 바로 두 지표가 측정하는 ‘범위’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구분 GDP 디플레이터 소비자물가지수 (CPI)
측정 대상 국내에서 생산된 모든 재화와 서비스 가계가 소비하는 대표 품목 (약 458개)
포함 항목 수출품, 투자재(공장 설비 등) 포함 수입 소비재(원유, 수입 과일 등) 포함
의미 국가 경제 전반의 생산 측면 물가 가계의 소비 측면 물가, 즉 생활 물가

2023년의 상황을 이 표에 대입해 보면 모든 것이 명확해집니다.

지난해 우리나라의 주력 수출 품목인 반도체 가격은 국제 시장에서 크게 하락했습니다. 이는 국가 전체의 생산품 가격을 보여주는 GDP 디플레이터를 끌어내리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습니다. 반면, 같은 기간 국제 유가 상승으로 수입 원자재 가격은 올랐고, 이는 우리가 매일 쓰는 석유제품 가격을 밀어 올렸습니다. 여기에 기후 변화 등으로 농산물 가격이 폭등하고 공공요금까지 인상되면서, 우리 집 가계부와 직결된 소비자물가지수(CPI)는 가파르게 치솟았습니다.

결론적으로, 수출 기업이 파는 물건값은 떨어져서 국가 전체 물가(GDP 디플레이터)는 안정된 것처럼 보였지만, 정작 우리 국민이 먹고, 쓰고, 입는 데 필요한 물건값(CPI)은 훨씬 더 비싸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지표와 체감 경기가 따로 노는 첫 번째 이유입니다.

3. 국가는 부유해졌는데, 내 지갑은 왜 얇아졌을까?

경제 상황을 파악하는 또 다른 중요 지표로 실질 국민총소득(GNI)이 있습니다. GNI는 GDP에 더해 우리 국민이 해외에서 벌어들인 소득까지 합친 것으로, 국가 전체의 실질적인 구매력을 나타냅니다. 2023년 한국의 실질 GNI는 1.8% 성장해, 실질 GDP 성장률(1.4%)보다 높았습니다. 쉽게 말해, 국가 전체의 주머니는 더 두둑해졌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또 한 번의 충격적인 통계와 마주하게 됩니다. 통계청이 발표한 2023년 가계의 실질소득은 오히려 1.8% 감소하며 역대 최대 하락 폭을 기록했습니다. 나라의 부는 늘었는데, 국민 개개인의 지갑은 어째서 더 얇아진 걸까요?

정답은 ‘분배의 실패’에 있습니다. 경제 성장을 통해 만들어 낸 과실이 가계, 즉 우리에게 제대로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국은행의 자료에 따르면, 국민총소득(GNI)에서 각 경제 주체가 차지하는 비중은 극적으로 변했습니다. 2022년 기준 GNI에서 가계가 가져간 소득 비중은 49.9%로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습니다. 반면, 기업이 가져간 몫은 28.5%, 정부가 가져간 몫은 21.6%로 모두 역대 최고치를 경신했습니다.

  • 기업: 팬데믹 이후 실적이 개선되면서 기업이 벌어들인 영업이익은 크게 늘었습니다. 하지만 이 이익이 직원들의 임금 인상으로 충분히 이어지지 않고, 대부분 기업의 사내유보금 등으로 쌓였습니다.
  • 가계: 임금은 제자리걸음인데, 살인적인 고물가로 손에 쥔 돈의 가치는 계속 떨어졌습니다. 여기에 고금리 기조로 불어난 대출 이자, 세금과 사회보험료 부담까지 더해지면서 쓸 수 있는 돈(처분가능소득)은 오히려 줄어들었습니다.

결국, 국가 경제가 성장하며 만들어 낸 부(富)가 가계의 소득으로 흘러 들어오지 못하고, 기업의 금고와 정부의 재정으로 흡수되는 구조적 불균형이 고착화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지표와 체감 경기가 따로 노는 두 번째, 그리고 가장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숫자 너머의 진실, 이제는 ‘분배’를 고민할 때

GDP 디플레이터가 우리에게 보여준 진실은 단순히 물가가 올랐다는 사실 그 이상을 의미합니다. 이는 우리 경제가 생산 능력을 키우는 ‘질적 성장’이 아닌, 물가 상승에 기댄 ‘취약한 성장’을 하고 있다는 강력한 경고등입니다.

더 나아가, 그 과정에서 만들어진 소득마저 가계가 아닌 기업과 정부로 쏠리는 ‘분배의 실패’가 겹치면서 대다수 국민은 경제 지표와는 정반대의 혹독한 현실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명목 성장률이라는 숫자의 환상에서 벗어나, 우리 경제의 구조적인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해야 할 때입니다. 지금 가장 시급한 것은 가계의 실질 구매력을 높여 꽁꽁 얼어붙은 내수 경제에 온기를 불어넣는 것입니다. 안정적인 물가 관리는 기본이며, 기업의 성과가 가계의 임금 상승으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고, 과도한 금융 및 조세 부담을 완화하는 등 ‘성장의 과실’이 국민 모두에게 공정하게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 정책적 대전환이 절실합니다.

경제는 결국 ‘사람’의 문제입니다. 숫자가 아무리 화려해도 국민의 삶이 나아지지 않는 성장은 의미가 없습니다. 진짜 성장은 국민 모두가 그 온기를 함께 느낄 수 있을 때 비로소 완성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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